No. Name Email Date Hit
36 관리자 06/04/2011 19769
Subject: 마두원(馬斗元)과 나 - 방지일 목사님씀
Malsbary(馬斗元)와 나와의 관계
방 지 일

그는 음악을 전공하신 분으로 숭실대학교에 음악교사로 초청을 받으시고 내한하셨다. 강사의 위치로 음악을 가르쳤는데 음악도 이론뿐 아니라 그는 숭실대학 관현악단을 지휘했고 , 피아노, 성악도 가르쳤다. 때로 전국 순회 음악회를 하였다.

그의 한국 제자로서는 박태준박사 (연세대 초대 음악대학장을 지내신 분), 그리고 김홍전 박사 (도미하여 신학도 전공하고 음악도 전공한분이시다) 이 두분은 다 한국 음악계에 큰 공헌이 계신 분이시다. 김홍전박사는 대전대학의 학감을 지내시기도 했고, 언론기관에 봉사하다가 카나다에 이민가셔서 작고하였다. 박태준박사는 숭실대학에서 마두원의 조교 일을 맡기도 하였다.

나는 학생시절 <게자씨>란 월간지를 발행하면서 같이 기도할 일이 있으면 마두원선생의 집으로 새벽에 가곤 한다.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때로 만나곤 한다. 내가 무슨 문제를 제기하면 마두원선생은 성경을 펴면서 말씀으로 같이 읽고 기도하는 그 진지함이 비길데 없다. 어떻게 그렇게도 꼭 주시는 말씀을 찾아내는지 감탄사가 나온다. 하루 아침에는 찾아 갔더니 잠옷을 입은 채 문을 열어 주면서 들어오란다. 나는 ‘오늘 아침은 성경의 어디를 보셨소?’하고 물으니 ‘오늘은 에베소서를 16번 읽었소이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96 장을 읽은 셈이다. 이렇게 그는 참으로 진실하고 진지했기에 나는 그에게 혹하여 빠졌다 할 것이다.
그는 한국말은 못하신다. 그렇다고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나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통한다. 나는 그와 같이 가로(길) 전도도 많이 하였다. ‘오늘 내가 만난사람에게 길가에서라도 전도하지 아니했다면 이후 주님의 낯을 보기 미안하지 않겠느냐 하며 우리 말은 잘 모르나 성경을 펴서 들려주신다. 나는 같이 이렇게 작작 나무 팔러 모인 우차 거리에 매일 나가곤 했다. 거기서 참 많은 사람에게 전도를 하였다. 방학때가 되면 때로 먼 농촌으로 가서 교회에서 집회도 하고 며칠 간 촌집에 유하기도 하였다. 농촌교회에서는 가장 큰 대접이 닭을 잡아 국을 끓여 드리는 것이다. 마두원선생은 한국의 풍속을 모르시니 그 귀한 닭 국에다 밥을 말아 드시다가 남겨 놓기도 하였다. 먹을 만큼 덜어서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알려 드렸더니 이후로는 일일이 묻고 식사를 하던 것도 기억에 생생하다.

하루는 가로(길)전도를 하려고 나가는데 자기 집에서 공부시키는 중학생에게 택시를 불러오라 하였다. 그가 가서 차를 불러왔는데 그때의 택시라야 짚차같은 차인데 문이 다 낡아 그 추운 겨울인지라 불쾌하여져서 어디서 이런 차를 불러왔느냐고 책망을 했다. 그래도 타고 나가다가 다시 돌아 가자고 한다. 이렇게 그냥 가면 어쩌는가 물으니 ‘전도하러 가는 사람이 어찌 성을 내고 가느냐’ 하면서 돌아가서 그 학생에게 미안하고 잘못함을 고하고 나서야 다시 나간일이 있기도 하다.

그는 숭대 관현악단을 데리고 전국 순회를 여러번 했는데 연주할때에도 꼭 기도를 하고 시작한다. 한번은 적지 않게 화음이 어울리지 않자 막간 휴식시간에 전원에게 오늘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다고 자복하고 기도하고 시작을 다시 하곤 했다. 그는 기도꾼이었다.

때로 내 집이 게자씨사(社)라 우편물을 발송 할 때면 그도 같이 와서 포장을 하여 발송하는데 밤엔 냉면을 먹기도 했다. 그에겐 온면을 시켜드린다. 그런데 그 넹면 국수발이 잘 끊기질 않으니 ‘이러다간 입에서 홍문(항문)까지 이어져 통하겠다’는 말을 해서 웃기도 하였다.

나는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도 아니나 그와는 기도 동지로서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그를 찾아 기도하곤 했는데 그리도 신통하게 맞는 말을 성경에서 찾아서 같이 감사하면서 기도하고 살았다.

우리 게자씨 사에서 그가 편곡한 악보를 출판하여 평양 성가대에 배포한 일도 있다. 거의 80년전의 일인데 어딘가에서 그 책이 좀 발견되면 좋겠다.

이렇게 우리 둘이 거의 매일같이 새벽에 같이 기도했는데 이렇게 우리만 할 수만은 없다 생각하여 다른 기도 동지들도 마선생의 집에서 기도하게 되어 한 그룹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룰 받고 중국선교사로 떠났다. 그 21년이 지난동안 나는 정변을 중국서 다섯번이나 당했고 공산치하에 있으면서 완전 두절상태에 빠져 전연 외부와는 불통의 세계에 살았기에 본국소식도 모른다. 다만 내 친구 신앙동지인 김진홍이 미국서 적십자를 통하여 물어준 안부가 제일 처음이요 나중이라 할 것이다. 1957년 추방을 받아 홍콩을 거처 회국하니 마두원은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되어 오셨다. 성경장로교회 선교사인고로 교단이 달라져 있었다. 신학교도 세우고 활발하게 역사함을 보았다. 내 숙부는 그와 같이 성경장로교회에 합류하였다. 마목사는 강원도에서 일하시다가 교통사고로 별세했는데 성경장로교회장으로 장례할 때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는 그 총회에서 내게 추모사를 부탁하여 추모사로 그를 보냈다. 그의 묘소는 우리 기독교 묘원에 있다.
Track URL http://www.aijakim.org/mission/pvpros.cfm?do=view&boardregno=154&boardno=428&boardregyear=2011
               


Comments: